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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지

슬픔의 라 살레트, 눈물의 메세지, 목동의 증언

by treblue 2025. 4. 3.

프랑스 라살레트 발현지는 1846년 알프스 산맥의 작은 마을 라살레트에서 성모 마리아가 두 어린 목동인 멜라니아 칼바와 막시맹 지로에게 나타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인간의 죄와 무관심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라살레트를 방문했을 때 첫 느낌은 성모 발현의 메시지가 깃든 성지의 고요함과 경이로운 자연 경관이 성스러웠으며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를 되새기며 내면의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라살레트는 영적 성찰과 위로를 찾는 분들에게 추천해 드릴 수 있는 성모님 발현지로 꼭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깊은 슬픔으로 찾아오신 라 살레트의 성모

프랑스 알프스 산맥의 해발 1,800미터에 위치한 라 살레트는 1846년 9월 19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성지입니다. 이곳은 그르노블 교구에 속해 있으며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해 알프스의 성모로도 불립니다. 발현 당시 이곳은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받던 가난한 산간 마을이었으며 종교적으로도 냉담한 상태였습니다. 현재는 웅장한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과 순례자 숙소와 박물관 등이 있으며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합니다. 성지의 중심인 대성당은 1852년에 착공하여 1879년에 완공되었으며 성모 발현 장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발현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있으며 제대 뒤편에는 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에는 아름다운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발현 당시 마른 샘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기적을 기념합니다. 이 물은 많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집니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성모님의 눈물과 메시지를 묵상하며, 특별히 회개와 보속의 삶을 다짐한다. 성지 주변의 장엄한 알프스 풍경은 순례자들에게 깊은 영적 체험을 선사하며 특히 여름철에는 많은 도보 순례자들이 찾습니다. 성지에는 '라 살레트의 성모님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회가 상주하며 순례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라 살레트는 1851년 교회의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이후 라 살레트 선교회가 설립되어 전 세계에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매년 9월 19일에는 발현을 기념하는 대규모 순례 행사가 열리며 전 세계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라살레트 발현지 사진

성모님이 전하신 눈물의 메시지

1846년 9월 19일 토요일 오후 3시경에 발생한 라 살레트 성모 발현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영적 위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처음 발현하셨을 때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 눈물을 흘리고 계셨는데, 이는 인류의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외형적 모습은 매우 상징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흰색 긴 드레스는 순결을 진주빛 앞치마는 성모님의 영광을 황금색 신발은 천상의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특히 목에 걸고 계셨던 십자가가 달린 쇠사슬과 그 십자가에 달린 망치와 집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이에 동참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프랑스어와 현지 방언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셨는데 이는 메시지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와 보속의 긴급성이었으며 특히 당시 만연해있던 세 가지 주요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첫째는 주일 미사 참례 의무 불이행 둘째는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신성모독 셋째는 사순절 준수 의무 위반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적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세속화와 탈종교화 현상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회개하지 않을 경우 닥칠 구체적인 징벌도 예고하셨습니다. 곡물의 부패와 감자의 흉작과 어린이들의 죽음과 기근, 포도나무의 병충해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실제로 이듬해인 1847년의 대기근으로 현실화되었으며 이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재앙들이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회개를 위한 초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은 두 목격자에게 각각 다른 비밀을 전하셨는데 이는 교회와 세상의 미래에 관한 예언적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특히 멜라니에게 전해진 비밀은 1879년에 공개되었으며 교회의 위기와 세상의 재앙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비밀들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와 세상 전체의 쇄신을 촉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라 살레트 발현의 메시지는 19세기 프랑스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넘어 보편적인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회개와 보속의 필요성과 기도 생활의 중요성, 성사 생활의 충실도는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영적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성모님의 눈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과 염려를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두 어린 목동과 그들의 증언

라 살레트 발현의 목격자인 멜라니 칼바 마티외와 막시맹 지로는 당시 프랑스 산간 마을의 빈곤한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두 목동은 발현 전날 처음 만났으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공통적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문맹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오히려 그들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하는 요소가 되었는데, 그들이 전한 메시지의 신학적 깊이와 예언적 성격은 그들의 지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멜라니의 경우 일곱 살 때부터 여러 농가를 전전하며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발현 이후 1851년 코르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후 여러 수도원을 옮겨 다니며 은수자적 삶을 살았다. 특히 그녀가 받은 비밀은 1851년 교황 비오 9세에게 전달되었으며 1879년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비밀의 내용은 교회의 위기와 성직자들의 타락과 최후의 시련과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멜라니는 말년에 이탈리아 알타무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904년 12월 14일 72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막시맹의 생애는 더욱 곡절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란 그는 발현 당시 교리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발현 이후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고자 했으나 학업을 견디지 못하고 중퇴했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에서 마부, 철도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875년 3월 1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가 받은 비밀은 끝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두 목격자의 증언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관성을 유지했으며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 수준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체계적인 증언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모님의 모습을 세세한 부분까지 일치하게 묘사했으며 전달받은 메시지의 내용도 서로 모순 없이 증언했습니다.

교회 당국은 발현 직후부터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두 목격자는 개별적으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며, 의학적, 심리적 검사도 받았습니다. 모든 조사 과정에서 그들의 증언은 진실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예견한 재앙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발현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두 목격자의 이후 삶은 매우 대조적이었으나 둘 다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멜라니는 수도 생활을 통해 영성의 길을 걸었고 막시맹은 세속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끝까지 자신들이 목격한 발현의 진실성을 증언했으며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라 살레트 발현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으며 현대에도 그들의 증언은 많은 이들에게 영적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